예수님을 소개합니다

‘예수 믿으세요!’라는 말은 이제 너무나 식상해지고 어떤 때는 반감마저 불러일으키는 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교회는 ‘예수 믿으세요!’라는 말을, 궁극적인 ‘오지랖’을 함으로써 교회로서의 존재 의미가 생기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괜찮다, 예수도 그 많은 괜찮은 존재들 중 하나일 뿐이다’라고 한다면 굳이 예수 믿으라 이야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하기에 저희는 예수 믿으라는 권고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저희 소망의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을 하려 합니다.

1. 예수님께는 ‘아버지’라 부르는 어떤 분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

위 성경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이 아버지라는 분을 ‘(우리가) 기도해야할 분’으로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기도’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종교 용어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그 근본적인 뜻은 ‘요구하다’ 내지는 ‘요청하다’입니다.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기도하다’는 ‘달라고 하다’를 의미의 고갱이로 삼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이 아버지라는 분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입니다. 하늘에 계시다는 것은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에 대한 묘사 중 가장 전형적인 묘사입니다. 하나님은 우선, ‘하늘의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아버지’라고 부른 이 분은, 예수님의 말을 따르자면, 기도해야할 분이신 동시에 하나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기도에 응함으로써 스스로를 하나님으로 드러내는 분’이 바로 예수께서 아버지라 부르는 어떤 분입니다.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예수님의 아버지는 달라고 하는 것을 줌으로써 하나님으로 드러나는 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2. 세상(의 다른 많은 신들)도 줄 수 있는 것이 많습니다.  

사실, 웬만한 종교의 신들도 주마 약속하고 있는 것이 많습니다. 종교마다 복된 사후 세계에 대한 보장은 기본 옵션입니다. 거기에다 신심의 강도에 따라 이 세상에서의 복도 더불어 주어집니다. 금욕적이고 나름대로 고등한 종교라 하더라도 아무것도 주는 것이 없다면 성립할 수 없는 것입니다. 깨달음이라도 줄 능력이 되어야 그나마 신자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종교의 가장 근원적인 동력은 ‘끊임없이 달라고 하기’, 바로 그것입니다. 굳이 종교를 가지지 않더라도 우리는 세상에서 무엇을 받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쟁취하려 하고 있습니까, 무엇을 달라 하고 있습니까?

3. 하나님은 세상이 없는 것을 주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요 14:27) 

사람이 가진 것은 저마다 다릅니다. 그러나 지금은 몸뚱아리 하나 겨우 갖고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환경과 운, 그리고 자기 노력 여하에 따라 빌 게이츠만큼 재산 모으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누구나 처음에는 자기 몸만 가지고 출발을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세상 모든 사람은, ‘세상이 줄 수 있는 것’과 ‘내게 지금은 없는 것’ 사이에서 달음질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생이 제아무리 달음질하여도 얻을 수 없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온 세상이 달음질하여도 얻을 수 없는 그것은 바로 ‘생명’입니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썩음을 당하는 것이거나 소멸당하는 것입니다. 참 생명은 ‘썩지 아니하고 불로도 소멸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이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아버지라 부르신 분은, 세상이 줄 수 있는 온갖 것을 주심으로써 당신의 전능하심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오직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을 주심으로써 예수님의 아버지는 스스로를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드러내십니다. 세상의 누구도, 어떤 신도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는 게 진정한 전능이라면, 예수님의 아버지는 참으로 전능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4. 우리에게도 아들이 있어야 합니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요일 5:11)

예수님의 아버지는 그냥, 홀로 나타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분은 아들을 통해, 아들 안에서 나타나시는 분이십니다. 이분이 세상의 온갖 것을 주는 신으로 스스로를 드러내려 한다면 굳이 아들 안에서 나타날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에게 오는 사람들을 친히 만나고 그들의 소원을 다 이루어주면서 그들의 마음을 훔치고 인기를 얻으면 족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아버지는 아버지로 드러남으로써 세상에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고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아들이 이 하나님을 나타내셨습니다.  

이 하나님은, 세상에 아들을 주는 방식으로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분명,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고 아들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입니다. 그러함에도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아들을 주시는 이 행위에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이 이미 전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아들이 없는 세상은 ‘멸망’의 도상에 있으며 영생이 없다는 판단입니다. 이 아들이 바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판단입니다. 이 아들은 세상이 낳을 수도, 세상이 만들어낼 수도 없는 분, 오직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품속에 있는 분이시요, 하나님의 생명이신 것입니다.  

우리는 처음에는 세상에서 났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아들이 없습니다. 세상 안에서, 사람 안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하기에 세상 그 자체로는, 사람 그 자체로는 하나님 정죄의 대상일 뿐입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그러므로 스스로를 어둠으로, 사망으로, 죄인으로 시인하는 사람이라야 하나님이 주시는 아들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오직 이 아들 안에서만 빛에 속할 수 있고, 생명을 누릴 수 있으며,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5. 예수님은 죽으셨을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4)

예수께서는 죽을 몸으로 오셨습니다. 사망을 피하거나 사망에서 스스로를 격리시키시지 않고 율법 아래에서, 여자에게서 나심으로 사망 한가운데로 임하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정죄를 받고 죽으셨습니다. 땅의 깊은 곳에 장사되셨습니다. 사흘을 무덤에 계심으로써 죽음에 넘기어졌음을 확증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렇게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뜻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을 멸하기 위함입니다. 아들을 다시 살리심으로써 아버지 하나님은, 참으로 죽음을 이기시는 생명, 본래 당신의 품속에 있었던 당신의 생명을 천하에 드러내신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이 생명을 이제 우리에게 주시려 하십니다.

6. 세상은 이 생명을 미워합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 3:19)

그런데 세상은 이 생명을 미워합니다.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을 수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멸망이요, 영생이 없다는 판단, 이것이 당신이 창조하신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판단은 바뀌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하나님의 세상 사랑하심은 필연적으로, 세상에 아들을 주시는 것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아들이 있는 세상, 아들의 영광으로 충만한 세상이라야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세상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진짜로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주심으로써 당신이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확증하셨습니다. 다시, 우리는 원래는 세상이요, 세상에 속한 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은 아들을 우리에게 주심입니다. 주시는 아들을 영접하는 자라야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는 권세를 받습니다.

아들이 ‘빛’이라면 세상은, 우리는 ‘어둠’일 수밖에 없습니다. 생명이 빛이라면 사망은 어둠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판단을 거슬러 어둠을 빛으로, 빛을 어둠으로 보는 것, 이게 세상의 죄입니다. 나와 세상을 빛으로, 오시는 아들을 어둠으로 본다면 그는 벌써 하나님께 심판을 받은 것이요 이미 하나님께 정죄 받은 것입니다. 아들이 없는 세상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습니다. 아들이 빛입니다. 빛이 있어야, 아들이 있어야 만물은 밝아지고 제자리를 찾고 충만해집니다.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7. 당신도 예수님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있습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 7:7-8)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7-13)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은 ‘아들의 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인 것입니다. 우리가 아들을 받았다는 것은 예수님이 갑자기 등장하거나 어떤 신비한 체험을 하는 것으로 확정되지 않습니다. 오직 성령을 받음으로써 우리가 아들을 받았음이 확정됩니다. 성령은 아버지께로부터 나오는 영이며, 아들이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영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아들의 영, 양자의 영을 받아,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새 사람’을 입습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는 내 안에서도, 내 밖의 만물에서도 발견되지 않고 오직 ‘성경’에서만 발견됩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성경을 아들에 관한 약속과 증언으로 풀 때라야 우리는 성령의 가르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령의 가르치심을 따라 나와 세상이 죄와 사망임을 알고 오직 아들을 의와 생명으로 삼는 그 길을 내딛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길을 드러내고 이 길로 부르는 것이 바로 의와 생명을 주는 복된 소식, 즉 ‘복음’인 것입니다.

성령을 받으시고 하나님이 주시는 영생에 참여하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새 사람을 입어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는 권세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요일 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