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론 및 직분론

구본승 목사

우리 교회는 장로교회이며, 저는 장로교회 목사입니다. 장로교회에서 목사는 목회만을 전담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전임 사역자를 세우는 이유는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는 일’(행 6:4)을 전담하는 직분자들이 사도 이후에도 필요하다는 판단 때문입니다. 물론, 이렇게 판단하지 않고 성도 모두가 생업 중에 틈틈이 말씀을 준비하고 기도하며 회중에게 가르치고 설교할 수 있다고 판단하는 교회 및 교단들도 있습니다. 이런 공동체에서는 대개, 전임 사역자를 세우지 않고 성도 모두가 돌아가면서, 혹은 임의로 회중에게 말씀을 전합니다. 목회는 온 교회 성도가 함께 감당하는, 온 교회의 일입니다만, 장로교회의 목사는 (원칙적으로) 일반 직업을 가지지 않고 오직 목회에만 전념하도록 배려됩니다. 

또, 장로교회 목사는 홀로 목회를 하는 것이 아니라 당회 조직되어 직분자들과 함께 목회를 하며, 목사를 비롯한 개교회 직분자들 역시 단독으로 사역하는 것이 아니라 개교회들의 모임인 (장)노회의 협력과 시 하에 사역합니다. 그래야 성도의 교제가 온전해지고, 더불어 인간의 약함과 죄성을 최대한 제어할 수 있습니다. 노회의 협력이나 시찰이 없이도 개교회의 사역은 온전할 수 있다고 여기는 교회 및 교단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장로교회인 우리 교회는 그렇게 여기지 않습니다.

이하의 내용은 이상의 사실과 장로교회의 직분론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11-12)

‘목회(牧會)’라는 말은 교회 안에서 매우 자주 접할 수 있는 말입니다. (네이버) 국어사전에 따르면 “목사가 교회를 맡아 설교하거나 신자의 신앙생활을 지도하는 등 공식적으로 행하는 활동”입니다. 사전에 등재되어있는 뜻풀이들은 항상 그 사회가 보편적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내용들입니다. 그런데 ‘목회’라는 말은, 사전에는 등재되어있지만 성경에 직접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성경이 직접 ‘목회는 이러저러한 것이다’라고 규정하지 않기에 목회는 자칫 사회의 통념과 상식에 좌우될 여지가 다분합니다. 목사의 신앙생활 지도, 설교 등의 형식을 갖추면 모두 목회의 사전적 의미에는 부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목회라는 말이 성경에 등장하지 않는다고 해서 성경이 목회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은 목사, 그리고 목회의 형식, 내용까지도 세밀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 모든 것을 다 논하고 쓸 수는 없지만, 개요적인 것을 적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위에서 인용한 에베소서에서 말씀하시듯이 목사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삼으신 자입니다. 스스로 선 자가 아니라 세우신 분이 계시기에 목사는 ‘직분(職分)’입니다. 이 출발점을 거듭, 재삼, 재사 확인하는 것은 아무리 반복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장로 직분, 집사 직분과 마찬가지로, 목사 역시 직분이기에 스스로 선 자도, 단지 교회 회중이 세운 자도 아닌 그리스도께서 세운 자인 것입니다.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분명 목회는 ‘목사가 교회를 맡아 하는 일 제반’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적 의미에서 목회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목사 직분을 수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목사라는 사람보다는 목사 직분이 우선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목사를 세운 것은 목사 직분을 위함이지, 목사 개인에게 뭔가 거룩한 뜻과 의미를 부여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즉, ‘목사 직분’을 위해 부름을 받아 세워진 사람이 목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부르시고 세우신 목사 직분의 직무는 무엇인지를 알아야할 것입니다. 이것은 위에서 인용한 에베소서 말씀에 정확하게 요약되어 있습니다 ―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시는 것.’ 여기서 ‘성도를 온전하게 하는 것’, ‘성도를 봉사의 일을 하게 하는 것’,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은 각각 별개의 일들이 아닙니다.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도록 하시어 결국 당신의 몸을 세우시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의 뜻인 것입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벧전 4:11)

그러므로 모든 목사를 포함한 모든 직분자들은, 위 베드로전서 말씀대로, ‘하나님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시듯’ 직분을 감당해야 합니다. 직분자, 특히 목사는 자칫 스스로 하나님처럼 행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 행세는 위 베드로전서가 말하는바 ‘하나님 같이’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직분자는 ‘하나님의 대리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아버지 하나님의 대리인이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요 6:18).” 그리스도에게는 ‘내 뜻’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당신을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신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라면 결코 내놓을 수 없는 목숨을 버리기까지 아버지께 순종하셨습니다 ―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8).” 이런 아들이라야 아버지께서 높이십니다 ―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9-11).”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대리하시도록 세우신 직분자는 그리스도를 대리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를 대리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대리인이라고 세도나 부리고 권력이나 휘두른다면 이것은 온전히 스스로를 부인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아버지께 복종하신 그리스도를 모독하는 것입니다.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합니다(마 10:24). 목사가, 직분자가, 아니 신앙인이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동일하게 가야합니다 ―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따라서 목사에게는 교회에 관철시켜야할 ‘내 뜻’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목회는 수행되어야 합니다. 위 베드로전서 말씀대로 하나님은 항상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십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이 무엇인지 밝혀집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아는 것이 결국 목회의 요체, 아니 전 신앙생활의 요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우리가 이심전심(以心傳心)이 되어 아버지 앞에서 모두 자녀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의 뜻이요 마음인 것입니다(롬 8:21).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자(요 1:18) 뜻이자(골 1:9-20) 비밀이신(골 2:2)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것이 목회의 본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롬 6:3-5)

그러나 목회는 결코 ‘정보 전달’일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와의 이심전심은 그리스도와 연합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일심(一心)은 반드시 동체(同體)를 동반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리에서 죽고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신 자리에서 살아나야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자리에서 죽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머리가 뉘이고 들리는 자리에서 몸이 뉘이고 들리지 않는다면 이 몸은 머리에 붙은 몸이 아닌 것입니다. 새 생명은 옛 머리가 잘려나가 옛 생명이 죽어야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목회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도래한 새 생명, 영생을 이식하는 작업이요(고전 3:6-7), 옛 집과 연을 끊고 그리스도께 시집오도록 중매하는 열심입니다(고후 11:2).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 4:13-16)

개역성경에는 잘 드러나 있지 않지만, 위 에베소서 말씀의 “온전한 사람”과 “그리스도의 충만함의 장성한 분량”은 같은 실체를 다르게 일컫는 말이라 볼 수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고 있는 교회’입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아 온전히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까지 장성하는 것이 바로 교회의 목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위 권면과 묘사는 단지 개인 차원의 것이 아닙니다. 신자 개인이 잘 알고 잘 믿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을 성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머리의 생명을 받고 있는 몸의 각 지체가 그 분량대로 역사하여 몸을 자라게 합니다. 교회에서 개인은 ‘지체’로서 의미가 있지, 스스로 무엇을 주장하는 머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위의 말씀에 나오는 ‘사랑’은 단지 교회 회원들끼리 잘 지내고 정을 나누고 하는 것을 넘어섭니다. 교회는 특정 개인의 덕성이나 원만함이 이끌어가서는 안 됩니다. 본받고 따라야할 분은 오직 그리스도시고 지체끼리는 서로 섬겨야 합니다 ―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 서로의 허물과 서로 잘 안 맞는 부분은 용납하고 용서해야 합니다 ―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엡 4:2).” 목회는 목사가 머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머리로 드러나도록 그리스도를 대리하여 교회를 섬기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여기까지 개략적이나마 이야기를 했을 때,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를 아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지식의 축적이 아님을 우리는 압니다. 결국 목회는 영생을 누리는 자리로 성도들을 이끌어가는 것이고, 이 자리는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 서는 자리입니다. 목회는 결국 참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것이고, 이 앎은 서로 사랑함으로써 장성한 분량에 이릅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 5:39-40)

영생을 얻기 위하여 그리스도께 가야 합니다. 그리스도께 가려면 그분이 계신 데를 보고 발견해야 합니다 ―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요 1:39).” 그분의 계신 데를 만물이 증언하지는 않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증언하지도 않습니다. 수많은 종교가 있고 수많은 지혜자와 선비와 변론가가 있지만 그들이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것도 아닙니다(고전 1:20). 그리스도는 오직 성경이 증언합니다. 따라서 목회는 그리스도에게서 출발하고 그리스도로 끝나기 위해 성경에서 출발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목사 직분의 핵을 이루는 직임은 바로 ‘성경을 그리스도를 증언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직임은 기본적으로 설교와 성례를 통해서 실현됩니다.

위 내용을 바탕으로 이제 네덜란드 한인교회라는 구체적 목회 현장에 대해 논해 볼까 합니다. 

저는 교민으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수십 년을 외국생활을 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세세한 부분까지 논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네덜란드 로테르담사랑의교회에서 지낸 경험과, 아주 짧은 미국 한인교회에서의 경험, 그리고 무엇보다 그간 암스테르담장로교회를 개척하면서 경험하고 생각한 것을 종합해서 이야기를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암스테르담장로교회는 대외적으로는 우선 ‘이민교회’입니다. 그러나 또한, ‘체류지 교회’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양면적 정체성이 암스테르담장로교회를 규정하고 있고 또 암스테르담장로교회의 현실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이민교회의 특성은 ‘1세대의 힘겨움’과 ‘2세대 이하의 문화적 단절’로 요약해볼 수 있습니다. 

이민 1세대분들은 많은 고생을 하고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낯선 타국에 터를 잡고 생계를 개척하신 분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 있었다면 겪지 않았을 어려움을 겪었고 또 여러 경험들을 나누고 비교할 수 있는, 문화와 말이 통하는 교제권이 그리 넓지 않을 수밖에 없기에 상대적 박탈감과 고단함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한국보다 힘들고 어려운 환경을 이겨내고 활로를 개척했다는 자부심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1세대분들은 한국 정체성을 포기할 수도 없고 포기하기를 원하지도 않습니다. 세월이 지날수록 한국 정체성에 대한 고집은 더 강해질지도 모릅니다. 이는 1세대분들이 대부분 성인으로서, 또한 성장기를 지나고 한 인격으로서의 정체성을 한국에서 형성시킨 후 이민을 오신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2세대 이하의 분들은 한국 정체성을 ‘자연스럽게’ 습득할 기회가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습니다. 오직 의식적이고도 주도면밀한 ‘교육’을 통해서만 한국 정체성을 습득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정체성의 핵심인 언어 습득은 더욱 어렵습니다. 1세대와 2세대 사이의 문화적 사상적 단절은 1세대와 2세대의 ‘모국어’가 다르다는 것이 가장 핵심점인 요인이라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사고방식과 문화적 감수성의 차이가 아닐까 합니다.

목회에 있어서 가장 핵심이 ‘연합’하여 함께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지는 것이라 할 때, 이민교회의 이러한 상황은 쉽지만은 않은 상황입니다. 좀 더 세세한 상황 분석과 인식이 필요하겠지만, 1세대와 2세대가 한국 정체성을 공통분모로 소유하지 못하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신앙은 하나’라는 사실에 주목을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신앙을 바탕으로 형성되는 정체성을 세대간 공통으로 소유하게 된다면 문화적 공통분모를 우회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설령 문화적 정체성이 좀 달라지더라도, 신앙적 정체성마저 놓치진 않아야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이민교회의 특수 상황은 뒤집어 생각하면 큰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1세대 분들이든 2세대 이하 분들이든 기본적으로 네덜란드와 한국 양쪽 문화 모두를 이해하고 있고 양쪽 문화 모두에 속해 있다는 사실 자체가 가능성의 원천입니다. 암스테르담장로교회는 네덜란드 사회의 일원으로서 한국적 요소를 포괄하여 진화된 공동체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반대로 한국 문화의 일원으로서 네덜란드적, 유럽적 요소들을 흡수하여 업그레이드된 공동체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작업이 잘 안 되면 어느 쪽에도 어중간한 상태가 되겠지만, 잘 되면 양쪽 모두에 시너지 효과를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제 ‘체류지 교회’라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네덜란드의 특성상, 네덜란드 한인교회의 구성원 중 많은 분들이 현지채용/주재원 내지는 유학생 등 중단기 체류자입니다. 짧게는 몇 개월 길게는 몇 년 정도를 주기로 구성원들이 계속 바뀝니다. 또, 다양한 교파와 신앙 배경을 가지신 분들이 동일한 공동체로 모여 교회를 이룹니다. 다시, 목회에 있어서 가장 핵심이 ‘연합’하여 함께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지는 것이라 할 때, 이러한 체류지 교회라는 상황도 녹록한 것이 아닙니다. 이민교회에서 연합을 어렵게 하는 것이 세대간 문화적 단절이라면, 체류지 교회에서는 물리적 환경 자체가 연합을 어렵게 합니다. 지체들을 양육하여 장성한 분량까지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우는 데에는 물리적, 시간적 연속성이 확보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체류지 교회라는 한계로 인해, 오랜 세월 숙성되어 발휘되는 신앙적 공감과 일치, 그리고 교제를 구현하기에는 어느 정도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게다가 중단기 체류하시는 분들이 암스테르담장로교회를 소위 ‘모교회’를 대하듯 할 것이라는 기대도 하기가 어렵습니다. 

따라서 암스테르담장로교회에서 모든 활동은, 다른 여느 교회들보다 좀 더 밀도가 있도록 해야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비록 일정 기간 체류만 한다고 하더라도 그 기간만큼은 집중해서 신앙생활하고 그리스도를 알아가며, 교회를 이룰 수 있도록 상황이 조성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부분도 누구나 공감하는 표준적인 대안을 제시하기는 어렵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신앙 외적인 것으로 중단기 체류자들에게 어필하기보다는 본격적인 신앙을 세우고 호소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체류지 교회만이 갖는 장점도 있습니다. 일단, 자기의 ‘본토’를 떠나 낯선 곳에서의 생활은 사람을 이전보다는 좀 더 개방적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따라서 의외로 본격적인 교제로 들어서는 기간이 짧아질 수 있고 또, 밀도 있는 신앙 교육도 가능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한국 같으면 교회 근처에도 안 왔을 사람이 교회에 발을 들여놓을 수도 있습니다. 이는 전도의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또, 우리 교회의 신앙생활이 모범이 될 수 있다면 우리 교회에서 신앙생활한 경험이 한국 현지 교회의 상황에 대한 개혁적 대안의 실마리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른 한편 중요하게 고려해야할 것은, ‘한인’교회라는 정체성입니다. 이민교회든, 체류지 교회든 ‘한인’교회라는 데서는 서로 일치합니다. 암스테르담장로교회는, 네덜란드 사람들도 얼마든지 교인으로 허입할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한국 정체성의 토대 위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신앙을 위한 소통의 매개로 쓴다는 전제 하에 모이는 공동체인 것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배우고 전수되고 또 나누고 소통해야 하는 것이기에 이러한 매개는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 교회는 네덜란드에 있지만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신앙 소통의 매개로 삼으며, 이것은 우리 교회가 한인 교회라는 정체성에 해당합니다.

이상의 논의를 볼 때, 암스테르담장로교회는, ‘한인’교회라는 정체성을 근간으로 삼아, 이민교회라는 정체성은 장기적 안목으로, 체류지 교회라는 정체성은 순발력을 가지고 대할 필요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제가 지금의 처지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릴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일단, 주일학교 교육은 이민교회와 체류지 교회라는 양 정체성을 모두 고려한다면 꼭 필요한 것으로 사료됩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민자 교인들의 자녀들보다 체류자 교인들의 자녀들이 한국 문화나 한국어에 더 능숙합니다. 따라서 이민교회의 특수성으로 인한 목회적 어려움을 어느 정도 상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물론, 자칫 잘못하면 이민자 교인들의 자녀들이 소외감을 느낄 수 있는 여지가 있기에 매우 민감한 문제이긴 합니다만, ‘한인’교회로서의 정체성 유지에 주일학교 교육은 매우 도움이 됩니다.

보다 본질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엄밀하게 말해서 주일학교는 ‘보조적’ 위치에 있습니다. 자녀 교육에 대한 책임은 일차적으로 부모에게 있는 것이 성경적 원리입니다(신 11:18-20, 엡 6:4). 부모가 집에서 자녀 교육을 손 놓고 있으면서 일주일에 주일 하루 하는 교육으로 자녀의 신앙이 자라는 것을 바라는 것은 난망한 일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언약의 자녀로 볼 수 있는 안목이 있을 때라야 제대로 주일학교와 연동된 신앙교육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일학교는 그냥 특정한 부서로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전 교회적 차원의 전망을 가지고 운영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멀리 내다보면, 결국 암스테르담장로교회의 신앙적, 문화적 정체성의 미래를 담지하는 곳이 주일학교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인들을 위한 교육은 여러 성경공부 모임을 개설하여 수행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과는 달리, 성인들은 각자의 삶터에서 욕구하고 소망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단지 이것을 충족시키는 식으로 성경공부가 수행되어서는 곤란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삶을 도외시하고는 신앙생활이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성경공부를 하는 근본적인 목적이 나의 위로와 나의 상황 해결에 목적이 있는지, 아니면 위에서 논한 대로 그리스도를 아는 것인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자신의 삶 가운데로 해소시켜서는 참 신앙인이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인들을 위한 성경공부 모임이 어떤 형태를 띠든 기본적으로 말씀 그 자체에 먼저 천착을 해야할 것입니다. 내가 필요한 말씀들을 추출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를 장악하는 시간들이 되어야할 것입니다.

교인들과의 교제와 소통은 목회에 있어서 불가결한 것입니다. 제아무리 성경을 가르치는 일에 헌신했다 하더라도 들을 사람들과의 소통과 교감과 교제가 없다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러한 소통은 어떻게 보면 목사에게 있어서 외국어를 배우는 것과 비슷합니다. 외국인들과 제아무리 서로 끌리고 좋아도 오랜 세월 소통을 하고 접촉을 해야 제대로 교감을 하고 공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말을 듣는 것도 내가 말하는 것도 모두 오랜 세월의 소통과 접촉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목사의 기본적인 설교 사역을 위해서도 깊이 있는 소통과 교제는 반드시 이루어져 할 것입니다. 이러한 소통과 교제를 효과적으로 구현하는 것이 전통적으로는 심방이었습니다. 하지만, 꼭 가정을 방문한다는 형식을 갖추지 않더라도 심방의 본질인 교인들과의 소통은 어떤 형식으로든 가능하다 하겠습니다. 게다가 지금은 SNS를 비롯하여, 소통의 매체는 넘쳐납니다. 이러한 매체들은 오용하면 부작용이 적지 않지만, 선용하면 좋은 소통의 매체로 활용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함에도 얼굴 대 얼굴로 소통을 하는 것이 가장 성경적인 방식일 것입니다. 

이렇게 목사와 교인 간 소통이 있어야 목사가 교인들의 형편을 살피어 기도하기도, 권면하기도 합니다. 또, 성도의 어려운 형편에 대해서는 말씀을 따라 위로도 하고 함께 기도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목사와 교인들과의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부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소통을 통해 목사는 혼자서 목회를 하는 게 아니라 온 교회와 더불어 목회를 하는 것입니다. 소통이 원활할 때라야 목사가 독선적으로 되는 것이 방지가 되고 목회가 잘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목사가 특정 교인들과만 친밀해지는 것은 경계해야합니다. 우리 모두 죄인들이기에 항상 당 짓고 비방하고 수군거리는 죄악에 빠질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고후 12:20, 갈 5:20). 

끝으로 덧붙이자면, 목사는 홀로 있을 시간 역시 확보를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것은 소통하는 시간을 확보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이라 봅니다. 목사가 홀로 있을 때 목사는 크게 두 가지를 해야 합니다. 하나는 기도, 또 하나는 말씀 연구입니다. 기도와 연구 없이 설교 및 다른 사역은 지탱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목사에게 홀로 있을 시간이 안정적으로 확보되는 것이 목회에 중요한 한 요소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주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교회를 우리 함께 이루어가기를 소망합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