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

[구목사가 예배용으로 번역함]

I. 1. 나는 하나님 아버지, 전능자, 천지의 창조주를,
  Credo in Deum Patrem omnipotentem, Creatorem caeli et terrae
  2.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독생자, 우리 주님을 믿노라.
  et in Jesum Christum, Filium eius unicum, Dominum nostrum,
  3. 이분은 성령으로 잉태되시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고
  qui conceptus est de Spiritu Sancto,
  4. 본디오 빌라도 아래에서 고난당하사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으시고 장사되셨고 음부에 내려가셨으며
  natus ex Maria Virgine, passus sub Pontio Pilato, crucifixus, mortuus, et sepultus, descendit ad inferos,
  5. 사흘 만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으며
  tertia die resurrexit a mortuis,
  6. 하늘로 올라가사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며
  ascendit ad caelos, sedet ad dexteram Dei Patris omnipotentis,
  7. 거기서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하러 오시리라.
  inde venturus est iudicare vivos et mortuos.

II. 8. 나는 성령님을 믿노라.
  Credo in Spiritum Sanctum,
  9. 또,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sanctam Ecclesiam catholicam, sanctorum communionem,
  10. 죄 사하여주심과
  remissionem peccatorum,
  11. 육신을 부활시켜주심과
  carnis resurrectionem
  12. 영생을 [믿노라]. 아멘.
  et vitam aeternam. Amen.

I, II 두 부분으로 나눈 번역의 辨 

일단 사도신경에 ‘나는 믿노라[피스테우오]’가 명시적으로 두 번 쓰여진 데 뜻이 있다고 생각한다. 먼저는 ‘아버지 하나님과 그분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노라’이고 그 다음이 ‘성령님 이하를 믿노라’이다. 니케아신경이야 맨 처음에 ‘우리는 믿노라[피스테우오멘]’이 성부를 고백하는 데 딱 한 번 나오고 나머지 두 위격은 ‘카이 에이스~’로 처리하고 있기에, ‘피스테우오멘’이 단지 생략되어 각 위격에 대해 ‘믿노라’라고 고백하고 있다고 봐도 큰 무리가 없지만 사도신경은 그렇지 않다. 심지어 니케아신경조차 성부와 성자 항목에 성령 항목에 없는 ‘한 분뿐인[헤나]’이라는 말을 붙여 내적 형식이 사도신경과 일치하고 있다. 

원문의 형태를 그대로 우리말화시킨다면 다음과 같다 ― “나는 하나님 아버지, 전능자, 천지의 창조주와, 성령으로 잉태되셔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고 ~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하러 오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독생자, 우리의 주님을 믿노라. 그리고 성령님과 ~ 영생을 믿노라.”

일단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I만으로도 삼위 하나님에 대한 고백으로 손색이 없다는 점이다. I에서 아버지, 독생자, 거룩한 영 모두 ‘하나님’이고 이 하나님은 ‘전능자’다. 또, 이 전능함은 ‘천지를 창조하심’, ‘성령으로 잉태되셔서 ~ 심판하러 오실 것임’, ‘동정녀 마리아에게 (육신의 생명이 아닌[=창조되지 않은] 생명을) 잉태시키심’이다. 종교적 신의 요체가 ‘전능함’이고 이 전능함은 온갖 일을 다 할 수 있는 힘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의 전능함은 정사와 권세에 의해 고난 받고 죽임당한 예수 그리스도를 살리시는 능력으로 발휘가 된다는 것이 사도신경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실상 종교적 신의 전능함은 인간의 종교적 욕망의 시작과 성취인바, 사도신경의 신상(神像)은 종교적 신상을 무너뜨리고 훼파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천지를 창조하심=성령님의 잉태=4~7=전능하심’이라는 것. 니케아신경은 성부-성자의 연결고리를 좀 더 명시화한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만물이 지은 바 되었습니다’라고 말함으로써 성부의 창조와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을 연결시킨다.

그러므로 정 성령님에 대한 고백이 부족하다 싶으면 I의 고백에다 ‘나는 성령님을 믿노라’라고만 덧붙여도 삼위 하나님 자체에 대해서는 고백이 완결된다고 나는 본다. 실상 II항은 성령님을 끈으로 하여 삼위 하나님에다 ‘우리’, 즉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이라 부르는 무리를 참여시키는 데 그 의의가 있다고 본다. 9~12는 모두 이 ‘우리’에게 일어나는 ‘전능자 창조주 하나님’의 일이다. 그런데 이 일들은 그냥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동정녀에게 잉태시키신 바로 그 성령님 안에서 일어난다. 그러하기에 모든 것에 우선하여 성령님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성자 항목에서도 성령님이 먼저 등장하고 우리 항목에서도 그러하다. 예수님의 잉태와 고난, 부활은 모두 성령님의 일하심이라고 말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실제로 복음서와 서신서에도 그렇게 나와 있다. 또 예수님을 말하는 부분에 ‘아버지 하나님’ 역시 등장한다. 그러니까 전통적인 이해방식인 ‘사도신경은 삼위 각각에 대해 말하는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재고해봄직 하다. 사도신경은 분명 삼위에 대해 말하지만, 그 방식은 굉장히 기독론적으로 중층적이고 입체적이다.

통용되는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라는 번역을 배척하지는 않지만, 이것은 이 구절의 맥락 전체를 드러내기에는 좀 부족한 번역이긴 하다. 원문 ‘에피 폰티우 필라투’가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이 역사적인 사건이라는 것을 물론 내포하긴 하지만, 사도신경에서 이 부분을 언급하는 것은 마 20:25 이하, 막 11:42 이하, 눅 22:25 이하 그리고 바울이 말하는바 ‘통치와 권세’에 대한 내용을 반영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 세상 신(종교적 신)의 전능함을 행사하는 주체가 바로 ‘통치와 권세’라 할 때, ‘에피 폰티우 필라투’는 예수님이 바로 이 통치와 권세에 의해 죽임당했다는 것을 적시하고 있는 것이다. ‘통치와 권세’는 정치 권력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권위와 권세와 힘을 통칭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에피’라는 말이 근거 내지는 원인 등을 드러내는 전치사임을 고려한다면 눅 4:27의 ‘엘리야의 때에’처럼 ‘빌라도의 때에’라고 번역하는 것이 좀 더 원문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라틴어는 ‘숩’이니까 ‘빌라도 밑에서 압제 당했다’의 뉘앙스가 강하니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통치와 권세조차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므로 성자에게 해당되는 내용 중 성부의 뜻에 벗어나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